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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질문들

나는 그때 산수도 못하는 금융문맹이었다

by iamyourlifeguardian 2026. 6. 8.

가난이라는 악어 입속으로(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하여)


620만 원에서 320만 원으로

2011년이었다.

아내는 S대 행정대학원에서 보육행정 석사를 마치고 부천의 반도체 회사 사내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월급은 380만 원이 넘었다. 나는 교회에서 240만 원을 받고 있었다. 합치면 620만 원이었다.

그 무렵 아는 분의 소개로 고척동에 아파트도 마련했다. 대출이 있었지만 세입자를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그런데 그해 부산의 한 큰 교회에 이력서를 넣었고,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별다른 계산 없이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지 못한 것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가 한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내는 석사까지 마치고 원장으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면 그 경력이 끊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생각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고척동 아파트도 급매로 팔았다. 은행 이자까지 생각하면 손해를 보고 나온 셈이었다. 한 푼도 남기지 못했다.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의 뱃속에는 막내가 자라고 있었다.

다섯 식구가 320만 원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620만 원으로 살다가 부산에서 320만 원으로 사는 것이다. 산수만 해봐도 말이 안 되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산수를 하지 않았다. 할 생각조차 없었다.

메가처치에 간다는 생각만 했다.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했다.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쌓아온 시간이 보이지 않았다. 생활이 보이지 않았다.


얼빠진 선택

부산에 내려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해운대 인근 아파트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다. 그 시기에 매입했다면 3년 후 급등장에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융을 몰랐고 부동산을 몰랐다. 그냥 월세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빠진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조차 몰랐다.


부산에서의 6년

부산에서 6년을 살았다.

아내는 그 6년 동안 경력이 끊긴 채로 B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첫째는 국제고를 다녔다. 둘째는 지금도 해운대 바다 근처에서 살았던 기억을 좋아한다.

막내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 시절이 나쁜 시간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다.

나는 그때 가난이라는 악어의 입속으로 스스로 머리통을 밀어 넣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걸 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인지를 못하고 살아 왔다는 것이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걸 제 발로 걷어 차버리고 빈곤의 구덩이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나같은 인간이 또 있을까.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

믿음이 있으면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현실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지였다.

가족을 책임지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도 공부가 필요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도 현실을 보는 눈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배웠다.


그래서 지금 배우고 있다

지금 나는 보험을 배우고 있다.

주식도 공부하고, 재정과 노후에 관한 책도 읽고 있다.

예전의 나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분야들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저 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청약통장 하나 제대로 모르던 사람이 이제 생애설계를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늦게라도 배우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아는 만큼 준비할 수 있고,

준비한 만큼 덜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